박종화, 몸으로 체험한 예술로 살아남은 자의 진실 말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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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 몸으로 체험한 예술로 살아남은 자의 진실 말하고파
  • 김성진 기자
  • 승인 2023.10.05 1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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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시간을 소나무 한글화에 주력하다 인문학적으로 접근 놀라운 결과 낳아
박종화, 작가및 시인. 몸으로 체험한 예술로 살아남은 자의 진실 말하고파/사진=김선녀 기자
박종화, 작가및 시인. 몸으로 체험한 예술로 살아남은 자의 진실 말하고파/사진=김선녀 기자

박종화, 1963년생인 그는 80년대 대한민국 격랑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 민중항쟁을 가장 극렬하게 체험한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 사건은 국가적으로도 큰  일이었지만 한 개인에게도 엄청난 사건이기도 했다.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해 3차례 옥고를 치렀고 그의 삶을 결정하는 결정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작가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3남 2녀 중 둘째인 그는 거창한 꿈조차도 없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공납금으로 기타를 살 만큼 음악을 좋아했으니 일찌감치 예술의 기질은 지니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사서 치기 시작한 기타는 그가 민중가요를 작곡하고 가사를 쓰게 만드는 디딤돌 역할을 했던 게 분명하다. 민중가요로 87년 데뷔한 그는 처음에 작곡을 하다가 차츰 창작 영역을 넓혀 시를 써서 등단하기도 했다. 

특히 그에게 서예는 단순히 재능이나 취미를 넘어 남다르게 격랑의 시간을 겪은 심신을 다독여주는 쉼의 역할을 했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배운 글자와 그 글자 하나를 완성했을 때 주고받은 아버지와의 추억이 그를 서예로 깊이 이끌었다. 

서예는 오랜 기간 민중가요를 작곡하면서 거칠고 사나운 가사 때문에 예민해진 성격을 많이 유화시키고 틈틈이 혼돈의 마음을 다스리기에 큰 역할을 했다. 

징역을 사는 수감자들은 종이 한 장 연필 한 개 맘대로 지닐 수 없는 상황이다. 하루 중 겨우 30분 허용되는 운동 시간에 마당에서 주운 못이나 돌멩이를 이용해 음표를 적고 마치 주산 암기하듯이 멜로디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6개월의 수감 생활을 하면서 200여 곡의 민중가요를 작곡했다. 

그중 25곡을 골라 음악 테이프로 만들어 발표했던 바, 10곡 정도가 노동운동의 군중 가요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는 20대 후반에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직업적인 활동가로 살기를 꿈꿨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불리면서 리얼리즘 문예 강연이 쇄도하고 그사이 음악 테이프는 15만여 개가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는 그가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 예술의 리얼리즘 미학의 길을 걷게 만든 단초가 됐고 전방위적 예술가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그의 직함은 작곡가이고 서예가이며 시인이다. 특히 소나무 그림을 한글화시킨 작품은 그의 예술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7년의 시간을 소나무 한글화에 주력하면서도 그는 이를 리얼리즘 미학이라는 명명하에 쉽게 어느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인문학적 관점으로의 접근은 버라이어티하면서 무구한 범위로의 확장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고 급기야 독보적인 한글 소나무화의 장인으로 거듭났다. 

그는 이 작품들로 작년 국립아시아 전당 전시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전시 활동을 하고 있다. 또 시서화음 박종화의 <한글 소나무>를 발간해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길을 정리했다.

그렇게 40년 동안 시(詩) 서(書) 화(畵) 음(音)을 두루 섭렵한 박종화 작가. 여기서 잠깐 그가 옥고를 치른 이야기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82년 전남대에 입학한 그는 국가보안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동료들의 희생은 그에게 지금까지 죄스러움으로 남아있다. 

그는 “살육의 현장에 직접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자 몫이고 의무”라면서 “당시의 참혹한 실상은 지금 60이 넘은 나이에도 선명하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죄의식은 더 커져만 간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그는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나 어린 동료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만큼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19년 만에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문학사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졸업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젊은이로서, 남자로서 격동의 시절을 지난 수많은 고초를 겪고 몸과 마음엔 깊은 상흔이 남았지만 이제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고백한다. 마음껏 좋아하는 노래를 작곡하고 노래하고 연주를 하며 그날의 아픔을 치유한다. 

박종화 작가는 1963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87년 음악 활동을 시작해 30여 차례의 단독공연, 400여 곡의 창작곡 발표. 1992년 시집 <바쳐야 한다> 외 2권. 다수의 서예 개인전. 2021년~2022년 ‘오월 어머니의 노래’ 프로젝트 총감독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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