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의 레슬러 유인탁, 여전히 체육인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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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의 레슬러 유인탁, 여전히 체육인으로 존재한다.
  • 이주옥 기자
  • 승인 2020.06.22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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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체육이 세계 정상에 오르고 체육인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선배로서, 후배로서 노력하겠다”
현재 유인탁선수는 전라북도체육회 사무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유인탁선수는 전라북도체육회 사무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양정모선수와 함께 대한민국 레슬링계에 쌍두마차인 유인탁 선수는 현재 전라북도체육회 사무처장으로 재작하고 있다. 은퇴 후 여전히 체육 일선에서 대한민국 체육과 체육인 후배들을 위해 물심양면 팔 걷고 나선, 몇 안 되는 체육행정가다. 누구보다 선수로서의 입장과 체육계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의 고민과 함께 더불어 한국 레슬링계의 현실을 들어보기로 한다.

Q. 레슬링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동기는?
- 이리농고 재학 당시 수업이 끝나면 교실 뒤쪽에서 힘 좀 쓴다는 친구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팔씨름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팔 힘이 좀 쎄다 보니 동참하게 되었는데 다른 친구들을 모두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힘이 쎈 학생으로 명성이 나다보니 학교체육대회의 씨름종목에 나가게 되었지요. 역시 씨름에서도 다른 친구들을 제압하고 우승을 하였습니다. 당시 이리농고에는 레슬링부가 있었는데 이런 저의 모습을 보신 학교 체육선생님께서 레슬링을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1984년 LA올림픽 때 한국에 마지막 금메달을 선사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그때 기분을 다시 한 번 회고한다면?
- 당시 제 나이가 27살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선수나이 27살이면 환갑이 지난 것이나 마찬가지라 선수생활에서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셈입니다. 결승전 장소는 애너하임 컨벤션센터로 상대는 세계챔피언인 미국의 앤드류 라인이었습니다. 경기장의 5천명 관중은 일방적으로 앤드류 라인을 응원하고 있었고 심지어 대회 관계자는 앤드류 라인이 금메달을 못 따면 그게 기적이라고까지 했습니다. 특히 저는 8강에서 허리 부상을 당한 상태라 몸 상태나 전력, 관중들의 응원까지 상대 선수에 비하면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자 저는 “제발 한방만 걸러라”는 심정으로 경기를 풀어갔고 경기시작 1분여 만에 메어 던지기로 3점을 얻어 출발이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상대선수 공격으로 3-4 역전을 당했고 후반전까지 역전에 재역전을 펼치며 5-5 동점으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특히 상대 선수가 어떻게 해서든 점수를 내려고 종료 10초전 제 왼쪽 다리를 꺾었는데 순간 우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심한 통증을 느꼈고 결국 큰 부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저는 “다리 하나 끊어지면 어때, 난 다리 하나 없어도 꼭 금메달을 따고 말거야”라며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고 그렇게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게 됐습니다.
 
레슬링의 경우 동점으로 경기가 끝나면 더 큰 기술을 사용한 선수가 이기게 되는데 경기가 끝나자 김영준 코치님(빠떼루 아저씨)이 만세를 하며 제게 달려오고 그때는 저도 흥분한 상태라 다리 부상은 생각지도 못하고 매트를 돌며 세리머니를 펼쳤습니다. 제가 금메달을 따낸 겁니다. 다리 부상으로 휠체어를 타고 시상식에 갔고 진행요원의 부축을 받아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문득 4살 때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냥 어머니에게 “아들이 해냈다고, 금메달을 땄다”고 자랑하고 싶고 어리광도 부리고 싶어서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짜릿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현역선수시절의 유인탁선수
현역선수시절의 유인탁선수

Q. 레슬링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 1981년 일본 동경에서 슈퍼챔피언타이틀매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대회는 없어졌지만요.
이 대회는 세계랭킹 1위부터 6위까지 참여해 대결을 펼쳤는데 그때 당시 제 실력은 아시아 3위권, 세계 10위권 수준이어서 참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랭킹 4위였던 쿠바 선수가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게 됐고, 당시 일본에서 전지훈련을 받고 있던 제가 일본의 요청으로 쿠바 선수 대신 출전하게 됐습니다. 이른바 스페셜 게스트가 된 셈이지요.
첫 상대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일본 선수였는데 제가 가볍게 이겼고, 2차전 폴란드 선수를 만나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는 아쉽게 러시아 선수에게 져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제가 이 대회에서 강력한 선수들을 물리치고 은메달을 차지하면서 당시 관계자들이 엄청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Q. 당시 자유형의 거장이었던 양정모 선수로 인해 그레꼬로만형으로 종목을 바꿨는데 양정모 선수가 자신의 레슬링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 양정모 선수(형)는 저 뿐만 아니라 후배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습니다.
먼저 세계 챔피언의 체력과 기술, 정신력 등 수준(기준)을 보여줬는데, 쉽게 말하면 세계 정상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줬습니다. 이에 세계의 벽을 넘기 위해 정말 피나는 훈련을 했습니다.
 
또 양정모 선수가 훈련 하는 것을 보면 그다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주어진 훈련 량은 반드시 소화해야 신발끈을 푸는 성실성과 근성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정한 목표는 반드시 이뤄냈기 때문에 그 점을 제가 본받았습니다. 그리고 훈련 외적으로 선수들의 휴식 방법, 먹는 음식, 생각(사고), 몸 관리까지 교과서처럼 가르쳐 준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많이 배우고 본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Q. 엘리트스포츠의 번성으로 레슬링은 물론, 침체 된 스포츠종목이 많은데 현 레슬링계 또는 대한민국 체육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 지금에 와서 보면 헝그리 정신은 아니더라도 훈련이라든지, 훈련 외적인 문제라든지 ‘간절함’이 부족해진 것 같습니다. 또한 선수 수급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런 악조건에도 묵묵히 선수 생활하는 후배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런 선수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이 있을 때 만 관심을 받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이에 선수들을 향한 한결같은 관심과 선수들을 위한 복지가 더 향상되면 좋겠습니다. 또 선수 은퇴 이후에도 관리와 적절한 처우가 이뤄져서 그들이 운동을 통해서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이 하나가 된 시대가 왔습니다. 전문체육과 생활체육은 각각 개성이 있고 장단점이 있는 만큼 고루 관심을 갖고 동반성장할 수 있는 체육정책을 펼치면 한국체육은 더욱 발전하고 단단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Q. 레슬링 금메달리스트가 아닌, 개인 유인탁의 앞으로 꿈이 있다면?
- 지금 저는 전라북도체육회 사무처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17개 광역 시도체육회 중 전문체육인 출신이 행정을 맡고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보니 부담이 큽니다. 전문체육인으로 제가 행정을 잘 펼쳐야 후배들(전문체육인)에게도 길을 터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지금 제 위치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문체육 출신들도 행정 또는 전문분야에 고루 투입 돼 한국 체육이 발전하는 데 알찬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각종 프로그램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한국 체육이 세계 정상에 오르고 체육인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선배로서, 후배로서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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