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작가 이요한 화백, 40여 년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화폭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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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작가 이요한 화백, 40여 년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화폭에 담았다
  • 신명섭 기자
  • 승인 2021.05.07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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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삶, “순간순간 하나님께 맡기고 나의 달려갈 길에 대한 확신이 물러서지 않게 하심을 믿고 여기까지 왔다”고 말해;;;
성화작가 이요한 화백, 40여 년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화폭에
성화작가 이요한 화백, 40여 년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화폭에 담고 있다.

40여 년간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만을 화폭에 담은 성화작가가 있다. 이요한 화백이 그 주인공이다.

이 화백은 충북 진천 이월면에서 불교 집안의 8남매 중 7째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에 대부분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2년 동안 서당에서 한자 공부 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경찰서에서 소사 일을 하며 학교와는 거리가 있는 생활을 했다. 당시 손재주 많은 선친은 대장간을 운영하셨는데 이 화백은 그런 아버지를 닮았는지 무언가를 만들고 다듬고 조각하는 일에 남달리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특별한 소질이 멀리 소문이 났는지 당시 서울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고향선배로부터 그림을 배워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 화백은 1972년 17세 나이로 부푼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와 초상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것이 그를 오랜 세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단초가 됐다. 하지만 선배로부터 크게 호평을 받지 못해 급기야 낙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푼 꿈이 무너진 것에 방황하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상경했다. 이렇게 그림은 그의 운명이 되었다. 하지만 한 번의 낙망은 굳은 신념으로 바뀌었고 그를 연습벌레가 되게 만들었다. 노력하는 자를 당해낼 수는 없었는지 결국은 실력을 인정받게 되고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일반인들의 주문까지 밀려들 정도로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1973년, 이 화백은 지인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1974년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으니 여기에서도 쉽게 포기 하지 않는 그의 기질이 작용했던 모양이다. 그는 성경을 탐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 하면서 충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급기야는 요한복음에서 큰 감명을 받고 본명 이영희에서 이요한으로 호적상 개명까지 할 정도로 하느님 사랑에 빠졌다. 이에 이 화백은 성화를 통한 복음 선교사로서 사명을 감당하기로 다짐하고 성경말씀에서 얻은 생생한 감동을 사실주의 화풍으로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1979년 봄 16세기 초상화의 대가 ‘한스 홀바인’의 작품은 그에게 성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 단순히 유명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뛰어 새로운 인물화의 세계에 눈을 떴다.

이에 ‘구스타브 도레’의 판화성서를 교본삼아 본격적으로 인물화를 연구하고 차원을 높여가기 시작했다. 이 화백은 “성서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문화예술 선교사로서 길을 가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먼저 '양치는 목자(요한복음10장)를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 했다.

1980년, 진흥문화 초대회장 박경진 장로가 화실을 방문하였고 혼신을 다한 그의 작품들을 보게 됐다. 박 장로는 그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순서대로 정리하여 성경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화폭에 담았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가 성화를 편히 그릴 수 있는 화실과 전시장을 제공해 줬다고 하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해 온 끝에 얻은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1989년 금난 교회에서 첫 성화작품전을 개최했다. 

그 당시 작품을 보고 미국 종교 단체 등에서 초청 또는 판매하라는 유혹도 많았으나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 판매하지 않는 굳은 소신을 지켜냈다.

이 화백은 성화는 무엇보다 당시의 복식을 섬세하게 표현해야 했음으로 이스라엘, 터키, 팔레스타인 등을 오가며 복식을 연구할 만큼 온전히 성화 그리기에 전념했다. 그는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나 성화를 그리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그리면 그릴수록 더 고통스럽고 제대로 잠이 안 올 정도였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하긴 성경 속에 나오는 수많은 군중을 그리는 것에도 각각의 표정과 눈동자와 시선을 모두 달랐으니 그것들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고충이 감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이 화백은 그동안 여러 차례 전시회를 했다. 그러면서 마음에 상처도 받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노력과 애환이 실린 그림 실력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그가 지닌 외부적인 환경이나 조건을 보며 그를 판단하는 사람들로 인해 가슴 아픈 적이 많았단다. 그럴싸한 이력이나 타이틀이 붙은 외국의 유명화가의 작품이었다면 좀 더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컸다고 말한다.

종교지도자를 비롯, 많은 사람들의 그런 냉소적인 반응은 무명인 한국화가 이요한,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교회 성화에 대한 무관심이었기에 이 화백에게는 자격지심이나 피해의식으로 남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에 이 화백은 유명인의 작품만을 선호하는 의식은 진정한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비온 뒤에 땅이 굳듯 그가 받은 상처는 오히려 더욱 작품에 매진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기독교 기념관 성서 미술관의 성화를 통하여 복음에 더 가깝게 다가서고 또 성화를 통한 진정한 복음 전달을 평생의 꿈으로 삼았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 더 노력하고 기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화백은 “나는 비록 성서속의 사마리아 사람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아쉽지만 광야의 길을 홀로가신 예수님처럼 많은 시련과 시험의 순간들을 겪어 왔으나 결국 승리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을 끝까지 붙잡고 가겠노라”고 다짐 한다.

또 그는 “나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어 했을 때 방향과 목적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림을 다 팔았을 것” 이라고 하며 하느님의 뜻으로 소명의 길을 걷는 자신을 이야기 한다. 이는 즉, “소명을 가지고 서원한 성화이기에 간직하고 그릴 수밖에 없다”는 진정성이다.

이 화백은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듯 주의 자녀들에 대한 보상과 돌보심을 믿으며 순간순간 하나님께 맡기고 나의 달려갈 길에 대한 확신이 물러서지 않게 하심을 믿고 여기까지 왔다”고 감사하는 삶을 이야기 한다.

또한 그는 “40년이 지난 지금 작품 속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이로운 절대자였다“고 말하며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는 예수님을 그릴 때 진정 로마의 배부장의 독백을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존재가치다. 그러면서 자신은  40여 년 간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만을 화폭에 담은 성화작가임을 강조한다.

좌측)본사 신명섭기자 와 이요한 화백 기념촬영
(좌측)본사 신명섭기자 와 (우측)이요한 화백 기념촬영

이화백은 그동안 500여 점의 대형 성화 작품을 남겼고 그중 300백여 점을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에 담아 2021년 5월2일 새로운 화집을 발간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도 꾸준히 신약성서로 그림을 완성하여 한국성서 미술관을 건립하고 그에 한국교회 역사의 거점으로 남기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단순히 한 화가를 후원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명으로 받들 수 있는 비전 있는 성도, 교회, 단체의 협력이 너무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뜻있는 성화 작가들의 동참도 절실하며 그런 동행이야말로 한국 기독교 성서 미술관(The Bible Art Museum Korea)」 건립이 성취 될 수 있는 바탕이라는 점도 아울러 피력했다.

끝으로 이 화백은 “성서 화가로서의 삶이란 세상이 추구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기에 기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작품 한 점도 허튼 시간 속에서 탄생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또한 성화가 기독교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계기가 되고 한국 기독 미술작품으로서의 우수성을 널리 인정받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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